
솔직히 유럽 반도체 이야기를 뉴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글로벌 반도체 흐름에서 유럽은 항상 조연이라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런데 최근, 몇몇 기사와 정책 브리핑을 보다가 멈칫하게 됐습니다.
‘생산보다 영향력’, ‘속도보다 깊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 글은 유럽의 기술력 그 자체보다,
“왜 유럽이 다시 언급되기 시작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다 보니, 제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1. 유럽은 정말 '뒤처진' 걸까?
반도체 시장을 이야기하면 보통 미국, 한국, 대만을 떠올립니다.
직접적인 생산 능력, 실리콘 팹, 고성능 칩 제조 등에서
유럽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게 현실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유럽은 반도체 시대에서 조금 비켜선 거 아닌가?’
하지만 최근 자료들을 보다 보니, 그건 표면적인 이야기에 불과했습니다.
독일의 인피니언, 네덜란드의 ASML, 프랑스의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이 기업들은 단순한 참여자가 아니라,
글로벌 생태계에서 빠지면 칩 생산 자체가 멈추는 수준의 핵심 플레이어들이었습니다.
특히 ASML의 EUV 장비 독점은 기술보다 권력이라는 단어에 더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생산을 못 해도, 멈출 수 있게는 한다."
이건 시장 논리가 아닌 ‘입지’의 문제 같았습니다.
2. 기술이 아닌 '전략'으로 살아남는 방식
유럽이 흥미로운 이유는, 기술적 경쟁에서 밀리면서도 목소리를 잃지 않는 방식에 있습니다.
이건 그냥 ‘잘 버티고 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전략의 깊이에서 나오는 움직임이더라고요.
예를 들어, EU 반도체법(Chips Act)을 보면
그들은 "우리도 만들자"라는 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빠지면 안 되는 이유를 더 만들자"는 느낌입니다.
정말 특이한 전략이죠.
게다가 최근 AI 연산에 필요한 특화 센서, 에지 디바이스 중심의
저전력 칩 설계에서도 유럽 기업들의 접근 방식은
파워게임이 아니라 활용 중심의 설계에 가깝습니다.
이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속도와 시장만 보는 게 아닐까?”
유럽은 경쟁보다 방향을 먼저 설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 주변부에서 중심을 지키는 기술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유럽이 ‘중심’에 있으려 하지 않는데도 중심을 유지한다는 점입니다.
이건 기술보다 태도의 문제 아닐까요?
일례로, ASML은 전 세계에 공급하는 EUV 장비를
미국이나 중국의 수출 규제로 끊었다 풀었다 하면서도
스스로 ‘기술 정치’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뒤에서 판을 흔드는 구조입니다.
또 하나 느꼈던 건,
유럽 내 기업들의 ‘기술 정체성’이 명확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술은 안 해요.’
‘우리는 여기에만 집중합니다.’
그 말이 처음엔 배타적으로 느껴졌는데,
요즘은 그게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이나 미국처럼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문화와는 다른 길이죠.
그래서 더 신뢰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결론: 입지는 '자리를 지키는 힘'일 수도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도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습니다.
“입지란 결국 뭘까?”
매출? 점유율? 기술력?
유럽은 그 어떤 것도 1위가 아니면서도,
없어지면 전체 흐름이 흔들릴 만큼 존재감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사실, 유럽 반도체 기업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건
그들이 갑자기 무언가를 잘해서라기보다,
우리가 너무 시장 논리로만 반도체를 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글로벌 반도체’라는 큰 틀 안에서
속도가 빠른 쪽만 보다가, 방향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럴 때, 유럽은 느리지만 잃지 않는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이 글은 유럽 반도체가 앞으로 더 성장할 거란 예측이 아닙니다.
단지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입지’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만든
그 출발점이 유럽이었다는 기록입니다.